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플라시도 도밍고 (문단 편집) == 그 외 == 한때 [[루치아노 파바로티]]와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 '스리 테너 콘서트' 이전까지만 해도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던 모양. 오페라와 성악은 물론이며 일반 [[대중가요]]까지도 폭 넓게 불러왔으며, [[존 덴버]]와 같이 불러 유명한 Perhaps Love, 모린 맥기번과 같이 부른 A Love until the end of time 등 팝송을 담은 크로스오버 앨범들도 많이 내놓았다. 파바로티가 유명 가수들을 섭외해 진행한 자선 공연 시리즈인 '파바로티와 친구들'을 벤치마킹했는지, 1992년부터 2000년까지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유명 가수들을 불러모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오스트리아)|빈]]에서 [[빈 교향악단]]의 반주로 [[크리스마스]] 대중 콘서트를 개최하고 그 실황으로 라이브 앨범을 발매해 짭짤한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유명한 마드리디스타[* 스페인의 대표적인 [[축구]]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 CF]]의 팬.]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공식 응원가도 2번 맡았는데, 각각 창단 100주년 기념 곡 《Himno del Centenario del Real Madrid》(Hala Madrid), 챔피언스 리그 10회 우승 기념 곡 《Hala Madrid y nada más》로 의미가 큰 곡들이다. 《Hala Madrid y nada más》 같은 경우 원곡(2014년)이 있는 상황에서 2016년 11회 우승 달성 기념으로 새 버전을 녹음했다. || [youtube(sMUL2Ee1VoY)] || || 《Himno del Centenario del Real Madrid》 || 2011-12 시즌 [[라 리가]] 우승 축하 행사 때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 직접 나와 《Himno del Centenario》를 부르기도 했다.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 [[비센테 델보스케]] 감독 등과 더불어 2012년 레알의 명예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참고로 도밍고가 카레라스의 백혈병 투병을 계기로 카레라스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으나, 이는 잘못된 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호세 카레라스]] 문서와 [[http://mansurfox.tistory.com/921|다음의 웹 문서]]를 참고하라. 실제 카레라스와 관계는 라이벌이자 친구였다고 한다. 루머랑 달리 나쁜 사이는 아니라고. 성악가로서 전성기였을 때도 콘서트에서 직접 지휘를 하기도 했으며,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성악을 하기 힘들어지면 지휘자로 먹고 살겠다"라고 말하고 다녔는데, 실제로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지휘자 활동이 많아지고 있다. 다만 아직 성악가로서도 은퇴는 하지 않은 듯. 1990년대 초반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국제 성악 콩쿨을 만들어 계속해서 성악 인재들을 발굴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 공연 중 쑥쓰러워 하면서 부른 [[http://youtu.be/CMlhAeirflQ|그리운 금강산]]의 한국어 발음이 한국인 성악가보다 정확해 업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국 성악의 딕션이 외국보다 부정확하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 영상이 그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이 영상은 1995년에 있었던 [[홍혜경]]과 플라시도 도밍고, 베이스 [[연광철]]의 합동 연주회였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연광철이나 홍혜경보다도 오히려 더 정확한 한국어 가사를 들려준다. 뿐만 아니라 도밍고는 1996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스리 테너 콘서트에서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일본 청중들 앞에서 [[미소라 히바리]]의 명곡 [[https://youtu.be/4VjZenRzvr4|川の流れのように]]를 불렀는데 [[일본어]] 발음이 많이 서툴러서 거의 발음을 뭉개다시피 부르는 카레라스, 파바로티와 다르게 비교적 정확하게 발음해서 부르기도 했다. 지휘에 관심이 많은 만큼 같이 공연했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나 [[카를로스 클라이버]] 등 거장 지휘자들에 대해 자서전에서 비교적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미 세계 정상급의 성악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라얀과의 첫 녹음에서 상당히 긴장했던 듯 하다. 카라얀은 성악가들을 선정함에 있어 기존의 네임 밸류보다는 자신의 미학에 따라 선정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바리톤~테너까지 모두 소화 가능한 도밍고가 카라얀과 잘 어울릴 법하지만, 의외로 카라얀이 도밍고와 남긴 녹음이 별로 없다고 한다. 카라얀은 도밍고가 명성을 날렸던 주요 작품(오텔로, 아이다, 돈 카를로, 일 트로바토레, 카르멘, 토스카)[* 상기된 레퍼토리에서 도밍고는 70~80년대 녹음된 음반의 대다수에서 주역으로 기용되었다. 당시 녹음된 음반에서 도밍고가 아닌 테너의 음반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 위 레퍼토리에서 도밍고가 남긴 음반의 지휘자는 다음과 같다. [[돈 카를로스|돈 카를로]] -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클라우디오 아바도, 제임스 레바인(영상물), [[라 트라비아타]] - 카를로스 클라이버, 제임스 레바인(영상물), [[아이다]] – 에리히 라인스도르프, 리카르도 무티 클라우디오 아바도 제임스 레바인(영상물), [[오텔로]] – 제임스 레바인, 로린 마젤, 게오르그 솔티(영상물), 정명훈, 제임스 레바인(영상물), 리카르도 무티(영상물), [[일 트로바토레]] – 카라얀(영상물), 주빈 메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제임스 레바인, [[카르멘]] – 게오르그 솔티, 클라우디오 아바도, 카를로스 클라이버(영상물), 로린 마젤, [[토스카]] – 주빈 메타, 브루노 바르톨레티(영상물), 제임스 레바인, 주세페 시노폴리(영상물), 주세페 시노폴리, 주빈 메타(영상물)]에서도 도밍고 대신 상대적으로 커리어가 약했던 다른 테너를 기용했고, 특히 1979년 이후에는 당시 기준으로 도밍고보다 커리어가 훨씬 짧았던 [[호세 카레라스]]와 대부분 녹음했다. 카라얀이 카레라스와 남긴 음반으로는 돈 카를로, 아이다, 카르멘, 토스카, 베르디 레퀴엠 등이 있다. 카라얀이 79년 이전에 녹음한 일트로바토레 등도 79년 이후에 녹음되었다면 아마도 카레라스가 기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카레라스가 스리 테너로 도약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 카라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라얀이 도밍고와 녹음한 정규 음반은 투란도트와 가면무도회 정도밖에 없다. 가면무도회를 녹음할 적에 카레라스가 백혈병 투병 중이었기에 꿩 대신 닭으로 도밍고를 기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정규 음반 외에 카라얀은 도밍고와 영상물 2편(나비부인, 일 트로바토레)을 남겼다. 특기할 만한 점은 둘 다 카라얀이 영상물 제작 직전에 거의 동일한 배역진으로 정규 음반을 녹음했는데, 여기서는 다른 테너(파바로티, 보니솔리[* 일 트로바토레 영상 작업에서 보니솔리가 카라얀과의 의견 충돌로 하차하여 대역으로 도밍고를 출연시켰다고 한다. [[트로바토레#s-5.2|해당 오페라]] 문서 참고.])를 기용했다는 것이다. 비주얼 배우로서 선호도를 제외한다면 카라얀에게 도밍고는 목소리 자체로는 최선의 옵션이 아니었다는 심증을 더욱 강하게 해준다. 도밍고가 카라얀에게 품었던 존경심, 그리고 해당 배역에서 도밍고가 떨쳤던 명성, 그리고 오페라에서 극도의 유려함을 추구했던 카라얀의 해석을 생각하면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2018년 10월 내한 공연이 확정되었다. 판매 티켓 최고가는 55만 원으로 책정되었다. 다만 이건 전체 좌석 중 150석 가량되는 협찬사 물량(55만 원 Svip석, 44만 원 Vvip석)이고, 그 외에 VIP석 25만 원, R석 18만 원, S석 12만 원, A석 8만 원, B석 5만 5천 원이다. 고액 좌석 논란에 주관사는 억울하다는 입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